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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총정리 #프랑스와의 전쟁 #미국과의 전쟁

by erudispot 202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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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늘은 병인양요신미양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펴던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외세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고 있었고, 서양 세력, 특히 서구 열강의 침략적인 접근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내부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 혼란을 막으려는 의도였지만, 외부적으로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발맞추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서양 열강들은 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통상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병인양요 (1866년)

 1866년 병인년에 일어난 양요라 하여 병인양요라고 불립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와 조선 사이에 벌어진 무력 충돌이었습니다.

 

병인박해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 병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은 병인박해였습니다. 당시 대원군은 천주교가 서양 세력의 침투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천주교 탄압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와 함께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정부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 삼아 조선에 대한 군사적 보복을 결정합니다. 마치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해쳤으니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프랑스 함대의 침략과 강화도 점령: 1866년 9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피에르 귀스타브 로즈 제독이 이끄는 7척의 함선과 1,000여 명의 병력이 강화도에 상륙했습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손쉽게 점령하고, 조선의 중요 서적인 의궤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와 재산을 약탈했습니다.

 

조선군의 저항과 양헌수 부대의 활약: 프랑스군의 침략에 조선은 즉각적인 저항에 나섰습니다.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매복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곳에서 조선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예상 밖의 큰 피해를 입힌 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양헌수 부대는 프랑스군이 약탈한 서적들을 되찾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부를 탈환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철수와 병인양요의 결과: 조선군의 거센 저항과 물자 보급의 어려움,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프랑스군은 더 이상의 작전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로즈 제독은 약 한 달 만에 강화도에서 철수했습니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서양 세력과의 첫 대규모 무력 충돌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방어를 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서구 열강의 침략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고, 조선 내부적으로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신미양요 (1871년)

 1871년 신미년(辛未年)에 일어난 양요라 하여 신미양요라고 불립니다. 이번에는 상대가 프랑스가 아닌 미국이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미국인 선원의 죽음: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은 1866년에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통상 금지령을 어기고 평양 대동강으로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며 약탈과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에 분노한 평양 주민들과 조선군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했습니다. 미국은 이 사건을 자국민 보호와 통상 교섭의 실패로 간주하고 조선에 대한 응징을 결심했습니다.

 

미국 함대의 침략과 강화도 상륙: 1871년 5월, 아시아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5척의 군함과 1,200여 명의 병력이 강화도에 상륙했습니다.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하며 강화도 깊숙이 진격했습니다.

 

어재연 장군의 광성보 전투: 미군에 맞서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특히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미군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지만, 조선군은 오직 죽음을 각오하고 백병전으로 맞섰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압도적인 화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깃발 하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수적으로도 화력에서도 열세였던 조선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국의 철수와 신미양요의 결과: 광성보 전투 이후 미군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과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미군은 결국 한 달여 만에 조선에서 철수했습니다.

 신미양요 역시 조선이 외세의 무력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선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변화하는 세계 흐름에 대한 적응을 늦추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

  • 배경: 대원군의 쇄국정책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 장소: 모두 강화도에서 주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강화도는 한강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 원인: 서양 세력의 자국민 피해(프랑스 선교사 처형, 미국 제너럴 셔먼호 사건)를 빌미로 한 무력 침략이었습니다.
  • 조선군의 저항: 양헌수, 어재연 장군 등 조선군의 용감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 결과: 조선이 서양 세력을 일시적으로 물리쳤지만,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 문화재 약탈: 두 사건 모두 서양군에 의한 문화재 약탈이 있었습니다.

차이점:

  • 시기: 병인양요는 1866년, 신미양요는 1871년에 발생했습니다. (5년 차이)
  • 침략국: 병인양요는 프랑스, 신미양요는 미국이었습니다.
  • 주요 인물: 병인양요는 로즈 제독(프랑스)과 양헌수 장군(조선), 신미양요는 로저스 제독(미국)과 어재연 장군(조선)이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 상징적 유물: 병인양요 때는 외규장각 의궤가 약탈되었고, 신미양요 때는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가 노획되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이 근대화와 개방의 흐름 앞에서 얼마나 고뇌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들입니다. 이 두 사건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던져줍니다.

 쇄국정책이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결국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열악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싸웠던 조선군의 모습은 감동적이지만, 근대적인 국방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두 양요에서 약탈당한 문화재들은 우리 역사의 아픔이자, 후손들이 반드시 되찾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유산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이 사건들 이후에도 조선은 개항과 근대화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그 시련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등과도 같았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외부 세력의 도전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치열했던 삶과 그들의 고민이 담겨 있는 소중한 역사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국방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 등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그 거울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할 지혜를 얻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오늘도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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